방태산 산행 (2014.8.15)
광복절 아침 6시 똘수 포함하여 셋이 서울을 출발하여 덕소에서 경춘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진행이 어려워
톨게이트를 지나자 마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6번국도를 이용하여 양평,홍천을 경유하여
444번 지방도로를 가다가 다시 서석에서 잠시 56번국도를 타다가 다시 444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홍천과 인제의 경계선인 행치재를 넘어 다시 451번 지방도로및 31번국도로 상남까지 가서
다시446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미산리 개인약수에 10시경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다.
개인약수를 지나 주능선에 올라 작은 깃대봉에서 대골로 하산하여 저녁 8시50분에 매표소 옆에 도착하였다.
현리택시를 이용하여(미터기로 50.800원) 다시 개인약수로 돌아와 저녁 10시경에 출발,
새벽1시30분에 집에 도착하였다.
능선에 올라가니 가끔식 주위가 보일뿐 계속해서 운무가 바람을 타고 주능선쪽으로 넘어와
주변조망이 일품인 방태산 산행을 아쉽게 만들었다.
대청봉, 귀때기청봉, 안산등 설악산서북능선과 점봉산, 가리봉 그리고 방태산이 분기한 갈전곡봉,
약수산과 응복산,두로봉의 백두대간능선 또 오대산 비로봉과 효령봉,계방산과 소계방산등
동서남북으로 만학천봉이 일망무제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최고의 조망산행에 대한 기대는 난망이었다.
그러나 배달은석과 깃대봉 사이에 있는 안부는 대덕산에 버금가는 천상의 화원이었다.
온갖꽃들이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만끽하고 저마다 화려한 맵시를 뽐내며 천상의 꽃밭을 수놓고 있어
아쉬운 마음은 다소 위안이 되었으나
하산중 고행이 시작될줄이야....
풀이 우거지고 비가 많이 와서 길이 희미해지고 약초꾼,나물꾼들이 다니는 길 흔적까지 더해져
자칫하면 길을 잘못들기 십상이다.
한참 내려오다보니 갑자기 길이 없어지며 험한 지계곡이 가로막고 있어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진역우(進亦憂) 퇴역우(退亦憂) 라고 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찌 할수 없는 이런상황을 희랍어로 아포리아 라고 했던가
aporia의 진정한 의미를 저절로 깨닫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수년전 을수골에서 효령봉에 올라 비로봉에서 가칠봉, 소대산을 경유하여
소대산골로 하산중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길을 잃어버린 채 헤매다가
역시 험한 계곡을 만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때 순간 비박까지 생각했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지형을 잘 살펴 무사히 탈출할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일행이 있어 마음대로 할수 없다는것이 딜레마였다.
다시 올라가서 길을 찾기에는 너무 많이 내려왔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계곡으로 가야 한다는 고집을 따랐지만
물에 빠지고 넘어지다보니 팔다리 찰과상만 늘어나 도저히 더이상 진행할수 없는 이른바 진퇴양난에 빠진채
이생각 저생각 고민하다가 능선으로 가는것 이외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좌측 험한 능선으로 마루까지 올라가서 내려가면 제대로 된 등산로와 만날것으로 생각했으나
힘들게 올라가서 살펴보니 깊은 골과 산마루가 또 가로막고 있고를 무려 4차례나 반복하고서야
진짜 길을 만나 대골의 넓은 하천에 도착하였을때에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랜턴을 켰으나
어두운 밤이라 시야가 좁아져 하천을 좌우로 건너며 조심스럽게 가다보니
사방댐인지 수중보인지 큰교각을 세워놓은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더이상 헤매지 않고 목적지인 방태산 휴양림앞에 도착할수 있었다.
하산은 악전고투 그자체였다.
춘추시대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켰을때에 오자서가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평왕을 복수하고자
굴묘편시(掘墓鞭屍)한후 변명조로 언급했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고사성어가 저절로 생각났던 하산길이었다.
해는 저물고 길까지 막히는 이른바 일모도궁(日暮途窮)이란 고사성어가 딱 들어맞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시덤불등 잡목이 우거진 길도없는 험한 산을 한번 넘고나서 다왔나 하고 지형을 살펴보면
또 깊은 골과 험한 산마루가 딱 버티고 있고 우측 아래쪽은 아직도 험한 지계곡이 계속흐르고 있으니
심리적인 피로감과 불안감까지 가중되어 더욱 지친 상태에서 갈길은 먼데 주위가 어두워지기까지 하니
아무런 사전준비도 없이 어떻게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4번째 산능선을 올라가면서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또 길이 막히면 더이상 진행이 어려웠을텐데
험하고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는중 갑자기 보이는 훤한 공터가 어둠속의 한줄기 빛처럼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는데 가서보니 묘지였다.
바로 그순간 남송시대 육유의 시구가 생각났다
山重水複疑無路(산중수복의무로) 산과 물이 겹겹이 막고 있어 길이 없는가 했더니
柳暗花明又一村(유암화명우일촌) 버드나무 짙게 드리우고 꽃이 밝게 피어있는 마을이 또 있네
순식간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칙에 비추어 묘가 있으면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주변을 살피니
예상대로 묘지 아래쪽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길이 어둠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조금 진행하니 옛날 화전민들이 살았던 집터에는 꽃이 활짝 핀 키큰 구릿대들만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길을 찾고 대골의 넓은 하천에 도착할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험한 상황에서는 탈출 의지가 체력도 압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루였다.
집사람도 평상시의 모습이 아니었다.
초인적인 체력으로 나를 따라주어 너무도 안스러웠고 미안할뿐이었다.
똘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험한 산을 계속 넘을때 못가겠다고 한차례 버티다가
안된다고 강하게 얘기하니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악착같이 따라왔다.
똘수 역시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절박한 상황을 100%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잡목이 많은 곳에서는 똘수를 안고 갈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많았다.
좋게 얘기하면 산악 극기훈련 이었다.
정말로 조난직전에까지 간 힘들고 위험한 하산길이었다.
수년전 5월경 아무 문제없이 하산했던 똑같은 코스에서
방심과 한순간의 부주의가 그렇게 힘든 고난의 하산길이 되어 버릴줄이야...
산에서 길을 잘못 들었으면 비록 힘이들더라도
그쪽 지형에 아주 익숙하지 않는 이상
다시 올라가서 바른길을 찾아야 한다는 평범한 등산상식을 지키지 않은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