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종합 여행기 및 리마) 여행1(2019.11.06-11.30)
이번에 큰맘먹고 남미여행을 다녀왔다
어메리카 에어라인을 타고 인천과 남미를 왕복했는데
페루의 리마로 들어가서 올때는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나왔다
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브라질등 5개국을 25일 일정의 세미 팩키지 여행으로 다녀왔다.
특히 페루의 쿠스코등에는 잉카제국의 유물들이 많이 있었지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것은 거의 없었고
스페인의 말살정책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주춧돌등 흔적만 남아있어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었다
잉카제국의 원래이름이" 타완틴수유" 라고 엄연히 있는데도
스페인은 다스리는 왕을 의미하는 잉카가 마치 나라 이름인것처럼 자기 임의대로 얕잡아 함부로 불렀고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잉카문명 또는 잉카제국이라고 아무생각없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남미는 원래 수만년전에 동양에서 베링해를 건너간 사람들이 북미, 중미를 거쳐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통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으나
콜럼버스의 항해이후 엘도라도를 찾아 계속된 스페인등의 신대륙 진출로 원주민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으며
스페인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1532년 사생아및 문맹자로 알려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병사 180명에 의해 남미대륙을 평정했던 거대한 잉카제국이 허무하게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미스테리가 아닐수 없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등 수난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은 그들의 모든것을 말살하고 카톨릭을 강요하는등 모든것을 스페인화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
서양의 시각으로 보면 콜럼버스는 탐험가로서 신대륙을 발견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콜럼버스의 날을 지정하고 그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요 학살자요 만행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힘의 논리로 주인을 내쫓고 안방차지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때부터 식민지화하고 노동력착취, 자원수탈이 300여년동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수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서양에서 옮겨온 각종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코르테즈가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공격할때에 퍼트린 천연두가
결국은 남미에까지 퍼져
북중미를 포함하면 최소한 수천만명의 원주민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주민들이 많이 죽어 노동력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싣고와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지금의 볼리비아 고원에 있는 포토시의 세로 리코 광산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발견되어
스페인은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전세계 은생산량의 절반을 이곳에서 생산하여
본국으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수만명의 원주민들이 이곳에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은것으로 알려져있다
은을 비롯한 각종수탈을 계속하여 엄청난 자원을 본국으로 실어갔지만
이에 상응하는 경제발전이나 부를 축적하지 못해서
약 150년간은 세계최강으로 군림하는듯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1492년이 역사적인 한해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 왕자의 결혼으로 양국이 통합하여
첫째 800년가까이 지속되었던 이슬람세력을 그라나다에서 완전히 물리치고
이른바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이룩하였고
둘째 그동안 몇차례 거절하였던 이사벨라 여왕이 이슬람세력을 무너뜨리고 여유가 생겨
콜럼버스의 항해를 승인하고 지원해줘 중남미 식민지화로 이어진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셋째 같은해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여
결국은 경제측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은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다
상공업과 금융업의 중추인력이 이들 유대인이었으므로 이들의 추방으로
스페인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구슬은 식민지국가에서 엄청나게 들어왔지만
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사치품이나 생활용품을 수입하는데 은등을 사용하고
또 신교에 맞서 카톨릭을 지키기 위한 전쟁등에서 전비로 다 소비하여
최전성기의 펠리페 2세때 모라토리엄을 몇번이나 선언했던 것이다
그당시 유럽은 스페인으로 유입된 엄청난 은이 사실상 기축통화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간 영국과 네덜란드는 눈부시게 발전을 하였는데
특히 얼마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세계최고의 상공업 국가로 우뚝 섰다
혹자는 유대인의 이동경로와 부의 축적이 궤를 같이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완료 후 골수카톨릭주의를 포기하고
무어인과 유대인의 문화와전통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포용했다면
세계최강의 스페인시대가 오래지속되어 유럽의 세력판도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유럽의 풍부한 은은 명나라 말엽 일조편법의 시행으로 사실상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의 차,도자기,비단을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많이 흘러들어가고 중국은 수입을 거의 하지않는 무역 역조 현상때문에
영국은 은이 고갈되자 이를 되찾기 위하여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몰래 중국으로 보내
아편중독자들이 속출하고 청나라가 이에 강력히 대응하자
인류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인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것이고
결국 중국이 패배하여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역사를 더 과거로 올라가서 보면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도 기원전부터 은을 주고 중국의 비단등을
많이 수입하다가 은이 부족하여 그당시 기축통화였던 순도100% 은화인 데나리온에 구리를 넣기 시작해서
가치하락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결국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의 단초가 되어
로마 멸망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과 그동안 해상제해권,신구교 갈등,
그리고 네덜란드 독립등에서 서로 부딪히다가 참지못하고
16세기 늦은 후반에 영국을 응징하고자 이른바 무적함대를 파견했으나 도리어 참패하여
스페인은 그때부터 사실상 하향세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당시 스페인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던 영국은
세계최강을 향한 상승세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결국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80년 전쟁과 신구교간의 30년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으로
프랑스와 스웨덴이 오히려 실력자로 부상하고 스페인은 식민지인 네덜란드가 독립하는등
유럽무대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사실상 내리막길을 걸을수밖에 없어 세력판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또 북미의 3분의1과 중남미의 대부분을 식민지화하여 금은등의 자원수탈을 계속하였고
중남미에서 태어난 크리욜라와 스페인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스페인의 차별정책에 대한
현지 크리욜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와중에
19세기초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침공으로 식민지국가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본격적인 독립운동및 전쟁으로 이어져 중남미 대부분이 이때에 독립하게 되어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식민기간중 스페인은 잉카족의 태양신전등을 다 파괴하고 주춧돌은 놔둔채
그위에 대성당등을 건설하여 카톨릭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남미등은 서반어가 공용어가 되고 종교는 대부분 카톨릭신자인것이다
물론 원주민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볼리비아와 페루는
케추아어와 아이마르어를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의 여러나라들을 정복할때에
정복당한 나라들의 문화와 전통그리고 그들의 종교등을 존중해 줌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인본주의의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워
신본주의의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문명및 사상의 양대축이 되었던 것처럼
스페인도 남미 여려 원주민들의 모든것을 존중해줬다면 스페인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활짝 꽃피워 지금과 전혀다른 남미의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과거의 지난이야기는 그만하고 현실로 돌아와서 남미의 주요 관광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잉카제국의 흔적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유물은 페루의 마추픽추로서
전세계인이 보고싶어하는 관광명소이다
스페인이 죄다 파괴하고 말살해 흔적들만 대부분 남아있지만 협곡으로 둘러싸인 채
높은 산에 있는 마추픽추는 스페인이 그 존재를 몰라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미의 대표적 관광지인 마추피추를 가기위해서는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비행기로
일단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가서 성스러운 계곡등을 관광하고
다시 버스로 오얀따이땀보까지 가서
거기에서 기차를타고 마추피추역에 도착하면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마추피추산에 올라가면 되는데 가는길은
우르밤바강이 흐르고 옆으로 철도가 지나는 매우좁고 깊은 협곡으로 강따라 길을 가는것이외는
주변으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험산고봉에 둘러싸인 채 마추피추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쿠스코에서 그처럼 험한 협곡을 어떻게 헤쳐 지나가 아무도 없는 깊은 벽지에 있는 마추피추를 찾아내
공중도시를 건설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잉카제국이 대단하다는 말이외는 할말이 없다.
잉카제국은 불행하게도 기록문자가 없기에 남아있는 유적과 스페인의 기록에 의하여
짐작할수밖에 없는것이다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외진 깊은 산속에 이처럼 거창하게 왜 공중도시를 건설했는지?
무슨용도로 언제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미완으로 남아있는지등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명확히 알수 없는것이다
또 철제와 수레바퀴가 없었는데도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하고 다듬었는지도
궁금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잉카제국이 만들었다는 사실이외는 아무것도 알수없는 불가사의 그자체인 것이다
다만 미완으로 남아 있는것은 건설중 잉카제국의 멸망으로 건설이 중단된게 아닌가하고 추정은 할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 입장을 하고 한참 계단을 올라가니 갑자기 눈앞에 확 펼쳐지는 마추픽추를 보고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입이 쫙 벌어진다
해발3천미터의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란 뜻으로 공중도시 반대편에 있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산이고
해발2,800미터의 와이너픽추는 젊은 봉우리란 뜻으로 공중도시촬영시 빠짐없이 나오는 유명한 산으로서
사전 예약한 일정수의 사람들만 올라가서 잉카인이 만든 여러가지 시설들을 둘러볼수 있는 산이며
마추픽추에 갔을때도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육안으로도 관찰할수 있었는데
두개의 산 사이에 (더정확히 설명하면 와이너픽추쪽에) 자급자족형의 공중도시가 건설되어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관광하고 있는데 특히 서양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돌을 필요한 모양으로 다 깍아놓은채 그대로 있는것을 보니 갑자기 공사를 중단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위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니 우르밤바강이 마추픽추를 U자형으로 빙돌아 흘러가 아마존강의 원류가 되며
우르밤바강 건너편의 산들은 마추픽추산보다 훨씬 높은 산들로 이곳을 호위하듯 빙 둘러싸고 있었다
구경하는 2시간반동안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마추픽추를 둘러싸고 있는 우르밤바강 건너편의 높은산들은 운해가 계속 가리고 있었다
페루는 지금도 제2의 마추픽추의 존재 가능성을 높이 보고 험산협곡등을 수색중이라고 한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서 마추픽추 기차역 근처에서 트루차로 점심을 먹고있는데 엄청난 비가 한참을 쏟아진다
깊은협곡이라 그런지 이곳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돌을 다루는 기술은 세계최고였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은 형편없었기에
스페인에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나하고 별의별 생각을 해본다
마추픽추 관광후 알티플라노고원에 있는 쿠스코로 다시 돌아와 일박하고
아침에 버스로 출발, 하루종일 달려 저녁에 푸노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해발 3,800미터가 넘는 티티카카호를 배를 타고 유람하였는데
날씨까지 화창하여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다는게 정말 신기하였다
갈대의 일종인 토토라로 만든 갈대섬인 우로스섬에 사는 원주민인 우르족을 방문했는데
갈대뿌리를 감싸고 있는 뗏장의 강한 부력때문에 원주민들이 생활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민들이 침략자들을 피해 어쩔수 없이 갈대섬을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시간 30분이상을 배로달려 티티카카호의 41개의 섬들중 하나인 따길레섬을 방문하였는데
그섬도 역시 다른섬과 마찬가지로 산으로 되어있고 대부분 주민들은 산윗쪽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는데 모두들 해발이 높아 산소가 희박해서 그런지 가뿐숨을 몰아 쉬며
아주 천천히 어렵게 올라갔다
그곳 한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는데 그섬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코카콜라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곳이 페루의 잉카콜라인데
결국은 잉카콜라를 코카콜라가 인수하였다고 한다
티티카카호섬에서 처음으로 노란색 비슷한 잉카콜라를 마셔보았는데
톡쏘는 맛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그런지 다소 부드러운 맛이었다
모든 행정과 치안은 주민들 스스로가 한다고한다
섬에서 내려다보는 티티카카호는 마치 태평양 처럼 끝없이 펼쳐지고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어 바다처럼 보이고 호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안데스의 빙하물이 최소 25개의 강에서 흘러들어 호수를 이루고
유일한 출구인 데사과데로강이 멀리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에 조금 못미쳐에 있는
염수호인 포오포호로 흘러들어가나
전체 수량의 5%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건조한 기후에 증발된다고 하며
크기는 우리나라 충청남도와 비슷하고 약 40%정도는 볼리비아에 속한다고 한다.
너무나 화창한 날씨속에서 티티카카호 유람을 마치고
푸노의 여행자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비가 계속 쏟아져 어쩔수 없이 빗속을 뛰어 가까이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당초일정은 푸노에서 버스로 볼리비아 라파스로가서 시내관광후 비행기로 우유니로 갈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중대한 차질이 생겨 비행기를 몇차례 갈아타고 칠레 깔라마에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아타카마 사막을 경유, 볼리비아국경을 넘어 7-8시간을 달려
우여곡절끝에 우유니에 도착하였다.
볼리비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단연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알티플라노 고원의 해발3,600미터에 있다.
우리나라 경기도면적과 비슷하다고 하는 소금사막을 보니
이에 어울리는 옛시구가 떠오른다
동서기만리(東西幾萬里) 동서로는 몇만리인가
남북불능척(南北不能尺) 남북으로는 자로 잴수가 없네
티티카카호처럼 우유니 소금사막도 멀리서 하늘과 하나가 되어
그 크기를 육안으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수 없었다.
지각변동시 바다가 그대로 분지형태로 융기하여 바닷물을 담은 호수로 있다가 알티플라노고원의
건조한 기후로 수분이 계속 증발하여 소금만 남아 오늘날 소금사막이 된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소금사막이 6각형,8각형등의 결정체로 굳어져 멀리서 하늘과 맞닿아 있을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소금밭이요 소금평야였다
주변풍광은 티티카카호와 비슷하였다
하나는 물이, 다른하나는 소금이 한없이 있을뿐 그끝이 하늘과 닿아있고 주변에 산들이 보이며
푸른하늘에 흰구름을 이고 있는등 주변풍광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에서 알티플라노는 서반어로 고원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인데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인지 사하라 사막의 사하라처럼 특정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유명사화 돼버린것으로 보인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원으로 한반도의 약 80%에 육박하며
안데스 산맥이 바다에서 융기할때에 생긴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대부분 호수였다가 건조기후로 특히 남쪽부분이 말라
몇개의 소금및 염수호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고
분지형이어서 물이 바다등 외부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해발이 가장 낮은 호수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더욱 건조해져 세미사막,완전사막지대로 바뀌고 있었다.
우유니 주변 알티플라노고원에는 플라밍고가 먹이를 찾는 아름다운 소금 호수인 라구나 꼴로라다(붉은호수),
해발4,870미터에 있는 간헐천인 솔데 마냐나와 근처의 노천온천및호수,라구나 베르데(녹색호수),
기타 특이한 산등 볼거리가 많았으며
볼리비아 둘쨋날은 해발4,200미터에 있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시골 여관에서 1박을 하는등
고소가 높은 알티플라노 고원 투어에 고소증세로 시달리는 일행이 많았고
또 볼리비아에서 2박 모두 새벽4시에 기상하였으며
도로가 모두 비포장이어서 피로가 가중되었지만 국경을 넘어 다시 칠레의 깨끗한 포장도로로 들어서니
바로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아타카마사막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깔라마 공항에서 산티아고로 갔다
칠레의 산티아고 호텔에서 아침6시발 파타고니아행 비행기를 타기위하여 새벽2시20분에 기상하여
빵몇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3시30분에 공항으로 떠났다
비행기는 안데스산맥이 태평양쪽으로 치우쳐 있기때문인지 계속 안데스 산맥위로 비행을 해서
비행기 창문을 통해 맑은 날씨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설산과 운해등 안데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였다
남미의 끝자락에 있는 파타고니아는 서쪽의 비가 많은 칠레쪽과 상대적으로 건조한 아르헨티나쪽으로 나뉜다
칠레는 그유명한 토레스 델 파이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세로토레,피츠로이와 페리토 모레노빙하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꼭 가봐야할 명소이나
이번여행에서는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와 아르헨티나의 모레네 빙하만 보고
나머지는 여행대상이 아니어서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높은 산의 하얀 만년설, 빙하, 푸른호수그리고 끝없이 펼쳐져있는 목초지가
파타고니아를 상징하는 흔한 풍경이었다
특히 유럽이 원산지인 서양 민들레가 지천에 피어 있는등 파타고니아의 황량한 들판을 강한 번식력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칠레쪽은 강수량이 많아 대체로 푸른색을 띠고 있으나
아르헨티나쪽은 건조해서 상대적으로 갈색을 띠고 있었다
특히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정말로 매세워서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작은점봉산에서 점봉산으로가다보면 용수골에서 불어오는 매섭고 차가운 바람때문에
철쭉들이 키가 크지못하고 난쟁이처럼 작은 채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파타고니아의 나무들도 대부분 키가 작았고 한쪽방향으로 쏠려있는 모습이
평소에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첼레의 천페소 지폐에도 나오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하루내내 주변을 빙 돌면서
빙하가 깍아 만든 대자연의 위대한 걸작품을 여러각도에서 각각 달리 보이는 수려한 풍광을 즐겼으나
운해가 완전히 걷힌 푸른하늘을 끝내 보여주지는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투어였다고 생각한다
2박후 다시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넘어가서 엘 칼라파테의 언덕에 자리한 호텔에 도착하니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두번째로 큰 푸른빙하호인 아르헨티노 호수와 하얀설산등의 수려한 풍광이
바로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져 모든일행들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들이었다.
특히 페리노 모레네빙하는 만년설에서 흘러내려 바다가 아닌 호수에 엄청난 크기로 병풍처럼 차곡차곡
쌓여있었는데 물위에 떠있는 높이가 약70미터 안팎이라고 한다
물속에 잠겨있는 부분이 빙산의 일각이란 말처럼 훨씬크겠지만 그 크기는 가늠할수 없었다
제일 앞부분이 아니면 무너지는 소리는 들려도 무너지는 모습은 볼수가 없다
계속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다
빙하투어중 때맞추어 빙하 앞부분이 무너지는 광경을 모두 바로 눈앞에서 볼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역시 엄청난 파도가 위로 솟구친다
그래서 빙하투어를 하는 배도 빙하옆에까지는 접근하지 못한다
바로옆에서 빙하가 붕괴하면서 생기는 물결의 엄청난 위력에 배가 침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은 왜소해지고 겸손해진다는 사실을 거대한 빙하를 보면서 저절로 깨달았다.
엘 칼라파테의 일정을 마친후 비행기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내관광을 하고 다시 비행기로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스 폭포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남미에서 볼수 없었던 빽빽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어 또다른 남미의 풍경을 볼수 있었다.
남미의 다른지역의 나무들을 뽑아서 이곳에 다 심어놓은것처럼
숲이 너무나 울창했고 여타지역은 나무가 별로 많지 않았다.
이구아수폭포는 원래 파라과이 소유였으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서 빼앗아
일부를 정치적 목적으로 브라질에 건네주어 오늘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이구아수강을 경계로
공동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날은 아르헨티나에서 강을 가로질러 접근하여 한곳에서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이구아수 폭포를 구경하고 다음날은 브라질로가서 강을 상류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거리와 높이에서 이구아수 폭포의 넓은 지역을 자세히 구경할수 있었다
브라질이 관광객의 편의시설측면에서 아르헨티나를 훨씬 압도하고 있어 관광수입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다수가 아르헨티나에서 잠깐보고 바로 브라질로 넘어와 식사하고 쇼보고 잠자고 구경하고 있었다
지구상에 수량이 가장 많다는 이구아수 폭포는 한마디로 엄청난 물폭탄 그자체였다
아르헨티나에서 내려다보는 악마의 목구멍은 엄청난 수량이 낙하하는 곳으로
물보라가 비오듯 솟구쳐 서있기조차 힘들었고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도 선명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1분을 바라보면 근심이 사라지고 10분을 보면 생의 시름이 사라지고
30분을 보면 영혼도 가져간다고 하니 10분이상 보지말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모레네 빙하 무너지는 굉음 소리는 가끔식 들렸으나
이구아스폭포의 물떨어지는 굉음은 계속 지축을 흔들면서 귀를 멍허게 만들었다
물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할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브라질쪽의 첫번째 행사는 보트를 타고 이구아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폭포물이 낙하하는 바로 아래로
배를 밀어넣어서 짓궂게도 승객전부를 예외없이 물에 흠뻑 젖게 만들었는데
엄청난 수량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폭탄을 직접 맞은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끝나고 나서 모두 울창한 정글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브라질쪽은 메인폭포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올려다 볼수 있도록 강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만들어 놔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엄청난 위력으로 떨어지는 대폭포를 감상할수 있었지만
엄청난 물보라때문에 옷은 다 젖을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폭포의 위력에 압도되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듯한 공포감에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는것 같아 나도 몰래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
이구아스 폭포의 현실을 뛰어넘는 엄청난 위력 앞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숭고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특히 브라질쪽에서는 멀리서,가까이서 또 위에서,아래에서 셀수없이 많이 보아
세계최대의 폭포를 이틀째 바라보고 또 바라보니
이구아스 폭포에 내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에 대한 관념도 생겼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할수가 없어
"너의 언어로 묘사하려고 애쓰지 마라"는 말을 따를수밖에 없었다
세계최대의 폭포를 감상하니 당나라 원진의 시 이사(離思)중 첫 두구절이 생각났다.
曾經滄海難爲水(증경창해난위수) 이미(일찍이) 큰 바다를 본사람은 다른물은 물같지 아니하고
除却巫山不是雲(제각무산불시운) 무산의 구름을 빼고는 구름이 아니다 즉 무산의 구름이 최고다
(원진이 요절한 부인이 최고였고 다른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않는다는 일종의 도망시로서
첫구절은 맹자의 글을 인용하였고 둘째구절은 초나라 송옥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전적 소설인 앵앵전을 썼으며 한때 여류시인 설도가 사랑했던 바람둥이 원진의 속마음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마는 이과수 폭포를 보니 생각나서 인용함)
원진의 시구처럽 이제 세계 최대,최고의 이구아수 폭포를 봤으니까
다른 폭포들은 폭포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다른 폭포들도 나름의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나 멋이 있는등 고유한 특색이 있고
각각의 존재 가치가 있으므로
꼭 그렇지는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눈높이가 올라간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구아스폭포 일정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로 리오데 자네이로에 도착하여
남미의 마지막 여행을 마무리하였으며 다음날 저녁늦게 귀국길에 올랐다
안데스산맥없는 남미는 생각할수 없다
해양판이 남미판 밑으로 파고들어 융기하여 생긴것인데 그길이가 남북으로 7천킬로미터에 이르는등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다른곳에서는 볼수없는 오직 남미에서만 볼수있는 수려하고 색다른 자연경관을 만든 일등공신으로
동쪽의 대서양보다는 서쪽의 태평양쪽으로 많이 치우쳐 남으로 뻗어있어
아르헨티나쪽이 칠레쪽보다 훨씬 넓은 평원을 갖고 있다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 있는 칼라마에서 산티아고행 비행기를 탔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산티아고공항 사정때문이라며 안데스를 넘어 아르헨티나 멘도사 공항에
착륙하였다가
다시 산티아고공항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덕분에 안데스산맥의 위용과 험준함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볼수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여행일정은 페루의 리마,바예스타섬,와카치나사막,나스카라인,쿠스코의 성스러운계곡등,
우르밤바,오얀따이땀보,마추픽추, 육로로 쿠스코에서 푸노까지 버스여행및 티티카카호 유람
그리고 우유니사막및 알티플라노 고원의 아름다운 호수등 명소 또 육로로 칠레 아타카마사막,산티아고,
칠레쪽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쪽의 모레네 빙하
부에노스 아이레스,아르헨티나 이구아스폭포, 브라질 이구아스폭포,
리오데자네이로 시내투어를 끝으로 남미여행을 마무리한것 처럼
서쪽인 태평양쪽인 페루에서 파타고니아까지 쭉 남쪽으로가서 다시 동쪽에서는
다시 브라질까지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여행일정및 코스가 진행되었는데
여행중 돌발변수가 생겨 급히 여행코스가 일부 변경되었다
푸노에서 티티카카호수 투어를 마치고 버스로 지척에 있는 볼리비아 수도인 라파스로 갈 예정이었는데
원주민 출신인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갑자기 멕시코로 망명을 가는 바람에
육로로 라파스로 가는 길이 불가능하게 되어 비상이 걸렸다
남미여행을 와서 대표적인 관광지인 우유니 소금사막을 못보고 가는것은 있을수 없었기에
이번 인솔여행사의 서울본사와 남미의 거래 여행사들이 볼리비아 들어 가는길및
남미각 항공노선등 제반 정보를 철야 입수및 분석하여
그당시 유일한 통로인 칠레 아타카마사막에서 육로로 볼리비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였는데 항공권이 여유가 없어 12명과 6명이 다른코스로 가
칠레산티아고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인솔자와12명은 밤 12시에 푸노를 버스로출발,
8시간을 달려 아레키파공항에 도착하여 산티아고로가고
나는 6명에 포함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버스로 훌리앙카(julianca)에 가서
비행기로 리마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다시 리마에서 산티아고까지 거의 4시간 가까이 가는데 마치 저녁먹는 시간이 되어 당연히 밥을 주는걸로
알았는데 주지 않아 저녁도 굶고 산타아고에 있는 호텔에 새벽1시에 도착하여
자는둥 마는둥 새벽4시에 기상하고 모든일행이 다시 만나 비행기로 칼라마에 가서
다시 버스로 아타카마사막을 지나 볼리비아 국경에서 입국수속을 하고 계속 7시간여를 달려
저녁에 우유니사막 소금호텔에 도착하였으며 이후부터는 예정된 일정표대로 여행을 하였다
그때 우리일행들은 왜 하필 일생에 한번 남미에 왔는데 볼리비아 대통령이 이때에 도망을 갔느냐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잊지못할 추억이 돼버렸다
처음 전반부에는 여행일정이 매우 타이트하여 항상 새벽에 기상하여 숨가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으로 밥도 굶으면서 예정에도 없던 비행기를 3번이나타고
버스를 7시간 넘게 타면서 악전고투끝에 해발이 높은 알티플라노고원에 있는 우유니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때문에 일인당 경비가 70여만원식 추가 소요되어 여행사가 다 부담했다고 한다
또 이때 많은 분들이 몸살감기와 고소증세에 시달려 힘들었던 시기로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고행길이었던 것이다
이번일정은 비행기를 총 16번타고,버스도 어떤때에는 하루 종일 탈때도 종종 있었고,배도 4-5시간 탔고,
기차도 4시간정도 탔고,택시도 조금 탔는등 모든 교통수단을 다 이용한 긴 여정이었다
우리나라와 남미는 직항로가 없어 미국이나 유럽을 경유하여 가고 와야하기때문에
장시간의 비행으로 누구에게나 힘든 여행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여행이 끝난후 귀국일정을 살펴보면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미국 마이애미를 경유하여
다시 달라스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비행기 탑승시간만 약26시간, 2번의 환승및 대기시간이 4시간 안팎으로 별로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남미를 이륙한지 정확히 30시간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것처럼 너무나 멀고도 머나먼 곳이라 아니할수 없다
이번 남미여정은 우여곡절과 천신만고끝에 25일에 걸쳐 머너먼 대장정을 마치고 귀국한
내인생의 진정한 오디세이였다고 감히 말할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만 여행기를 쓰고 기타여행지와 못다한 얘기는 졸작인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풍경(아르마스광장및 산 마르틴광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