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만에 다시 화악산에 갔다.
얼레지꽃과 홀아비 바람꽃 그리고 진달래 등이 가는 봄이 아쉬운듯
일부 높은 지대에 아직도 남아있었고
깊은 숲속에는 피나물, 는쟁이냉이 등이 있었으며
귀룽나무꽃도 화악산 고지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행중 귀한 등칡과 백작약을 만난 것이 가장 가슴 벅찬 일이었다.
떠나기 싫어서 한참을 머물렀다.
특히 백작약(白芍藥)꽃은 등산로에서 한참떨어진 깊은 숲속에 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잘 번식할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루종일 산나물 향기와 꽃 기운이 가득한 숲속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선시대 박준원의 漢詩가 저절로 떠오르는 하루였다.
看花
世人看花色(세인간화색) 사람들은 꽃의 빛깔을 보나
吾獨看花氣(오독간화기) 나만 홀로 꽃의 기운(향기)을 느끼네
此氣滿天地(차기만천지) 이 기운 천지에 가득하면
吾亦一花卉(오역일화훼) 나역시 한떨기 꽃이 되리라 (註, 卉는 풀이나 초목)
박준원이 살았던 역사속으로 들어가보자
정조는 정비인 효의왕후가 애를 낳지 못해 애를 태웠는데
후궁인 박준원(위 漢詩의 지은이)의 딸 수빈박씨가 아들을 생산하여
그를 세자(정조 사후에 순조가 됨) 로 책봉하고 종통을 잇게하여 한시름을 놓았다.
정조는 조선시대의 중흥군주로서 마지막 현군이고 백성들을 사랑한 애민군주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도 우여곡절끝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아들 사도세자도 노론의 집요한 협공과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치는 비운의 세자였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경종때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죽이는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 등
가장 치열했던 숙종시대가 끝나고
남인의 세력이 거의 상실되자 숙종때부터 분열의 조짐이 있었던 서인이
이제는 노론과 소론으로 본격분열되고
서로를 죽이는 적으로 변하여 노론은 경종을 밀어내고 대신
연잉군(영조)을 임금으로 앉히고자 총력을 다하고
반면 소론은 경종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른바 택군(擇君)의 시대가 되었으니,
이는 왕조의 말기적 증상의 노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왕조국가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인데 이게 현실이 되었으니
왕조와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모든것을 당의 이익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그들의 사생결단의 치열한 당쟁과 탐욕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소론성향의 사도세자의 비운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론의 일당독재하에서 고군분투하던 사도세자는
처가인 홍봉한 일가, 처인 혜경궁홍씨, 친누이 화완옹주일가,
생모 영빈이씨 등 가장 가까운 친인척 까지도 그를 죽이는데 앞장섰으니
살아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홍봉한의 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는 왜 한중록 썼는가?
역사의 진실을 남기기 위해 쓴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고 실지는 정조 사후에 손자인 순조에게 보여주어
친정인 홍씨 집안을 신원시킬 정치적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실을 왜곡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인 사도세자는 버렸지만
아들은 적극 옹호하여 정조가 즉위하는데 큰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임금이 되는것을 노론이 묵과할수 있겠는가?
사도세자가 죽을때에 홀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울부짖었던 세손이
노론을 철천지 원수,
불구대천의 원수로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갖고 있으므로
임금이 되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필연적으로 뒤따를것은 불을 보듯 훤 한바,
노론은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세손을 제거내지 폐세손시키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영조의 과감한 결단과 지원에 힘입어 천신만고끝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나
노론은 특히 사도세자 죽음에 앞장섰던 홍계희 집안 후손들이 주도한 모의로
밤중에 임금인 정조를 살해할려고
자객들이 담장을 넘어 침실이 있는 존현각까지 침투한 (비록 발각되어 실패했지만)것은
조선시대 초유의 국왕살해 미수사건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노론에 포위된 현실을 인정하고
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하여 자기세력을 키우면서
훗날을 기약하는 노련한 정치기술을 발휘하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현명한 지도자였다.
정조는 서얼을 적극 등용하고 말년에는 공노비를 폐지하는등 시대의 흐름을 예견한 혜안의 군주였다.
그러다가 재위 25년쯤 되어 노론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였는지는 몰라도
노론들에게 대숙청을 예고하는 섬뜩한 경고성 발언을 하고
12일후에 훙(薨)하고 말았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있겠는가
어의 못지 않게 의학지식이 깊었던 정조는 노론들이 올리는 약을 한사코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조제를 명하면서 종기치료를 하던중 연훈방으로 상태가 호전되자
어떤일인지 노론들의 뜻대로 경옥고를 복용하고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는등 병세가 위독해졌고
이 와중에 임금의 임종은 여자들은 절대 접근할수 없는 것이 조선의 예법인데도
영조의 계비로서 골수노론인 정순왕후가 모든 대신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혼자 정조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 있던중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나서야 정조가 숨을 거둔것을 알았으니
노론에 의한 정조의 독살설이 나오는게 아니겠는가?
몸에 난 종기를 치료하는중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더해졌고 얼마후 급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하10여 일전에 노론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까지 있었고
또한 사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는등 노론들의 세상이 되었으니
일련의 정황상 죽음의 의혹이 증폭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조선의 국세는 급전직하하여
혼수상태(coma)에 빠져 세도정치로 이어지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보다도 가장 박학다식했던 대학자적 군주 정조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미처 다 펼치지 못한채
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에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격변과 굴곡이 심했던 영조,정조,순조시대를 살았던 박준원은
그의딸이 정비가 아니어서 사실상 정조의 장인이면서도
국구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꽃을 사랑하고 꽃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던 그의 열정과 여유만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