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에서 상원사가는 선재길은 섶다리를 건너가지 않고 계속 길을 가는데
오대산사고는 섶다리를 건너가서 차량통행하는
큰길로 나아가 상원사쪽으로 조그만 걸어가면
좌측으로 700미터 가면 오대산 사고가, 800미터가면 영감사가 나온다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목적지 끝까지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차량통행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이나 사고(史庫)근처에 주차장은 없다
조선초에 춘추관과 지방의 충주,성주,전주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이지역 선비인 안의와 손흥록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가까스로 지켜낸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사고가 전부 불에 소실되어 왜란후 선조때 다시 춘추관이외 오대산,태백산,묘향산,마니산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다(물론 그중 일부는 다른곳으로 이관되었지만)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를 수호사찰로 지정하였으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어
실지는 오대산 사고 바로위에 있는 영감사가 수호관리하여 수호사 역할을 하였다
영감사의 정확한 이름인 영감난야(靈鑑蘭若)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전 월정사 중건을 위하여
금강산에서 내려와 머물렀던 곳으로
오대산사고가 이곳에 설치된것은 임진왜란중에도, 끝난후에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사명대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때 우여곡절끝에 가까스로 보존된 전주사고의 문종실록 2개월(1451년12-1452년1월) 기록이
통째로 누락되고 다른기간 기록이 중복된 사실(전체 13권중 11권이 표지는 맞는데
내용은 9권으로 되어있어 11권이 결본임)이 발견되었지만 나머지사고의 실록이 전부 불에 타버려
편년체인 조선왕조실록중 문종의 2개월 기록은 아쉽게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실록은 주기적으로 햇볕과 바람에 말리어(포쇄) 변질을 사전에 방지했는데
오대산사고도 북쪽으로는 산이 가로막고 있어 찬바람을 막아주며
남쪽방향으로는 탁 트여 해볕이 장시간 내리쬐고
또 공기의 흐름이 원활해 통풍이 잘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깊은 산속에서 최적의 장소를 찾아내어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니
우리 선조들이 역사기록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단번에 알수 있었다
임진왜란때에 전주사고마저 소실되었다면 우리역사는 암흑속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사재를 털어가며 1년여 동안 눈물겨운 실록지키기에 자신들의 모든것을 바친 두영웅을
우리들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실록을 지킨 안의 선생의 생생한 친필 체험기록인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 서로 번갈아가며 지킨 내용을 기록한 일기)는
후손들이 400여년간 보관하다가 정읍시에 기증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위기에 처해있던 마지막 조선왕조실록과 중요한 서적들을
어떻게 보존할수 있었는지를 실감있게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정선읍의 병방치
월정사
선재길
오대산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