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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진시황릉 병마용,한양릉)여행2(2024.11.8-11)

진시황릉은 발굴을 못하는가?    안하는가?

사마천의 사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즉위 즉시 여산에 무덤공사를 시작하였고

천하통일후에는 70여만명을 동원하여 우물 세개 깊이 만큼 파고

구리 녹인 쇳물을  부어 곽(槨)를 만들고

궁궐과 여러관리들(모형) 그리고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채웠다

수은으로 수많은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했다

접근자에 대해서는  화살이 자동 발사되도록 되어있다

위에는 천문도를  그리고 아래는 지도를 갖추었다.

인어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했다.

장례와 모든 절차가 끝나자  가운데 묘도(中羨중연:가운데 무덤길)를 폐쇄하고 

바깥 묘도문(外羨門외연문)을 내려 

(비밀을 알고있는)장인과 노예들을 전부 나오지 못하게 했다

(능에)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그동안 항우를 비롯한 도굴시도가 많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도굴이 이루져서 부장품을 가져갔을 가능성은 희박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규모에 걸맞게 도굴대비도 완벽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비밀리에 소수인원으로는 뚫고 들어갈수 없을 것이라는 중론도 만만치 않다

 

병마용갱 박물관내부에 부착된 안내문(事死如事生사사여사생)처럼

죽은사람 섬기는것을 산사람 섬기는 것처럼 해야한다는

전통적 상장례와 제왕릉의 설계원칙에따라

오랜 세월동안 축조되고 만들어진 역대 최대 규모의

웅장하고 화려한 진시황의 지하왕궁과

그곳에 보관된 수많은 진기한 부장품 발굴을

만반의 준비없이 섣불리 시도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것이다

병마용도 처음에는 실물처럼 채색되어 있었는데

발굴시 공기와 접촉하면서 색이 변하고  많이 변질되었지만 

아직도 그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으며

완벽한 발굴기술도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것도

진시황릉 발굴을 미루는 주된 이유일것이다

더구나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에서  2,200년 동안이나 밀폐된 채  보관 되어있는

엄청난 양과 종류의 부장품  그리고 내부의 호화시설등이  갑자기 외부 공기와 접촉할때에

바로 퇴색되고 변질되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크게 상실할 우려도 많고

또 많은양의 수은가스가 갑자기 폭발할 가능성및

발굴시 물리력에 의한  내부시설등의 훼손등을 배제할수 없는등

현재 발굴수준과 기술로는  세계 최고및 최대의 고고학적 가치가있는 

불가사의한 지하궁전을 완벽하게 발굴하여 원래대로 복원 할수 없기때문에

중국당국은 발굴을 사실상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진시황제 병마용

멀리 보이는 산이 진시황제릉이다

 

진시황릉은 남쪽으로 여산, 북쪽으론 위수에 인접해 있는

형세가 아름답고 주변환경이 수려한 관중의 명소이다.

진시황제릉원의 설계는 죽은사람 섬기는것을 산사람 섬기는것처럼 하라는 전통적 상장례와

제왕의 능원은 도읍처럼 그리고 황권은 더할나위없이 높다는 원칙을 근거로 했다.

능원의 배치와 모든시설은 모두 이러한 이념을 근거로 했다.

진시황릉 주위의 내외 2중의 성벽은 궁성과 외곽성을 상징하고

높고 큰 무덤과 무덤아래 지하궁전은 살아있을때의 황궁을 상징한다.

규모가 큰 능원의 건축물들은 생전의 궁전을 상징한다.

능역내 각종모양의 매장구덩이는 진시황이 생전에 즐겁게 이용하고 소유했던 것들의 축소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전에 소유했던 모든것을 지하에 그대로 흉내내어 만든것으로

지하왕국은 지상왕국의 재현이다.

진시황은 이러한 상장례제도를 극치적으로 발전시켜 자기능원의 규모와 구조를

후세제왕들이 건축하는 능원의 본보기로 삼게했다

 

 

 

진시황제릉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
진나라 글자체

 

머리말

진의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원중 한곳으로 무덤에 딸린 대형 구덩이 이고

진시황릉무덤으로부터 동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곳에 위치하고있다.

역사문헌에도 기록되어있지 않고 진시황 생전에 주둔하고 지키는 경성밖의 숙위군을 상징한다.

1호갱은 1974년 3월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발견한후 작업을 계속하여 발굴하였다.

1979년 원유적지위에 전시관을건설하여 대외 개방하였다.

1호갱에 지하식 토목구조를 건축였는데 동서로 길이가 230미터이고

남북으로 폭이 62미터이며 흙으로 빚은 병사 말이 6천여건이 있다.

병마용은 생생하게 모델링하여 형상이 실물과 거의 같이 만든것으로서

중국 조소(조각하고 흙으로 빚어 작품을 만드는 행위)역사상 찬란한 보물이다.

병마용은 세계8대 기적(불가사의)으로알려져있고 인류문화유산급의 진귀한 재산이다.

중국 고대의 정치, 군사,과학,예술 연구에 모두 중요한 가치이고

중국 고대 노동인민의 지혜와 재능의 결정입니다

 

 

 

조명이 어두워서 병마용의 선명을 모습을 볼수 없었으며 원래는 실물크기로 만들고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발굴시 공기와 접촉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색되었다고 한다

 

1호갱개황

1호갱은 3개의 갱중 가장 큽니다.

동서로는 길이가 230미터이고 폭은 62미터로서 총면적이 14,260평방미터입니다.

현재까지 4,000평방미터에서 발굴된것은 흙으로 빚은 말 2,000건과 나무로 만든 전차 20량입니다.

1호갱에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이 6,000여건, 전차가 50량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시황은 성이 영이고 이름은 정으로 중국 역사상 첫번째 황제이다.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전국적 범위의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추진하였으며

중앙집권제를 개창하여 2천여동안 이를 따라 시행하도록 했다.

문자,화폐,법률과 차궤도,도량형을 통일했고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기초를 정했는데

즉 북쪽의 흉노를 치고 남쪽의 백월을 평정하였으며

또 만리장성을 수리축성하였고, 치도(馳道 진나라의 고속도로)를 수축하고, 도로를 직선화하고,

운하인 영거를 뚫었고,수륙교통을 강화했다.
다섯차례나 천하를 순유했으며 여러번 바다에 나가 신선을 찾았고 

삼황보다 덕이 높고 오제보다 공이 크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이로서 그는 시황제가 되었다

 

 

진의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으로부터 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모두3개로 品자 형상이고 점유면적이 총 2만평방미터가 넘습니다.

시추, 시험발굴과 정식발굴의 결과3개의 병마용갱에 병마용이 8천건에 가까울것으로 추측되고

지금까지 발굴된것은 천여건입니다.

병마용은 주둔하며 지키는 경성밖의 숙위군을 상징하며

진시황의 저승세계의 위술(수비)부대로 진시황의 지하군단이라고 할수있다.

이처럼 기세등등한 군진장면을 생동감있고 사실대로 묘사한 병마용은

스스로 체계적인 고대병기를 배치한 전세계적으로 드문 세계 8대 기적(불가사의)으로 불리는

20세기 세계고고사상 위대한 발견중 하나이다

 

 

 

 

수많은 병사들의 얼굴이 전부 다르다

 

 

 

 

한양릉(한나라 경제릉으로서 1990년도 고속도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했는데 수많은 부장품이 쏟아져 나와서 그당시 시대상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함)